월드 스토리

KKK단은 누구?

Koriweb 2013. 3. 1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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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해방은 남부 경제의 중심지었던 노예제를 무너뜨렸다.

자 이제, 자유를 얻은 그 400만 노예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급진적 공화파의 한 사람인 상원의원 타데우스 스티븐스는 남부 최대의 농장을 해체하여 노예 한 사람당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씩을 주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 시대의 가장 진보적인 인물까지 소유권은 신성한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자유를 찾은 흑인들이 있지도 않은 일자리를 찾아 대거 도시로 몰리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1867년의 남부 홈스테드법(Southern Homestead Act)도 당초엔 남부 공유지를 흑인과 연방에 충실한 백인들에게 불하해주려는 취지로 만들어졌으나 가난한 사람들은 그 땅을 구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돈도 없었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그 땅의 대부분은 덩치 큰 투기꾼, 목재회사, 대농장 소유주들에게로 넘어갔다.

본래의 취지와 현실의 차이가 재빨리 감지되자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물납소작인 제도(sharecropping)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모양만 달랐지 기본적으로 노예제와 다를 바 없었다. 해방 노예들은 이제 소작인의 자격으로 농사를 지어 주인과 수확물을 나눠가졌다.

주인은 또 소작인에게 자신이 정한 가격에 따라 종자와 생필품을 공급해주면서 그 대가를 수확물로 받았다. 이러나저러나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늘 빚을 지게 마련이었다.

또 다른 문제는 자본이었다. 전쟁이 종식되자 영토 확장론자들은 서부로 눈을 돌렸고 이에 북부 은행들은 철도 건설비용을 서부로 보내기 시작했다. 남부 역시 돈 없이는 성장을 이룰 수 없었다.

석탄 매장량이 풍부한 앨라배마 버밍햄을 중심으로 일부 제조업 중심지가 서서히 살아나기는 했으나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북서부의 산업과 철도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발전이었다. 그러자 남부인들은 정치와 은행을 주무르고 있는 공화당에 깊은 불신과 증오감을 드러내며 앞다퉈 민주당으로 몰려들었다.

1877년에 이르면 남부 주 정부 대부분이 다시 보수적인 백인 민주당의 손에 놓이게 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이 남부의 뿌리깊은 보수주의에 타격을 주기 전까지 남부의 민주당을 휘어잡고 있던 손은 바로 이들 백인 세력이었다.

재건에 대한 반동으로 파생된 것 중에서 그보다 더 우려할만한 일은 남부 백인들의 적개심이었다. 실패에 대한 울분으로 가득 차있던 이들은 권력을 쟁취할 새로운 수단을 찾고 있었다. 대다수 남부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정치권을 갖는 일, 심지어 이들이 남부 주의회까지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부 백인들이 싸워야 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백인 지배권 유지를 목표로 한 비밀폭력단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폭력단 중에는 흰동백꽃, 창백한 얼굴 등의 이름을 가진 단체도 있었으나 역시 가장 악명높고 강력하고 오래 살아남은 단체는 1867년 4월 내쉬빌의 맥스웰하우스에서 결성된 KKK단(Ku Klux Klan)이었다.

KKK단은 전직 사령관, 병사, 남부연합 지도자, 교회 목사들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영어를 섞어 쓰고 전사한 남부연합군 병사들의 혼령임을 자처하면서(그런 까닭에 흰옷을 입는다) 공공연하게 테러 행위를 일삼으며 남부에서 엄청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린치, 구타, 방화와 같은 여러 형태의 정치테러를 일삼으면서 흑인과 ‘진보적’ 백인 공화당원들을 효과적으로 위협했다.

이런 불법행위에 북부인들은 격분했다. 하지만 서부 확산과 같은 다른 문제들로 국정이 어수선해지자 격분은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재건법 개정도 그것인 진심에서 나온 것이든 순전히 정치적 야심에서 나온 것이든 흐지부지되었다.

*출처: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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