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당 전당대회 모습> |
도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힘겹게 결성해가는 동안 농촌에서는 급변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농민들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수백만의 농민들, 특히 남서부 소농들은 날씨야 사람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외의 다른 요인들에 의해 많은 고초를 겪고 있었다.
신용대부권은 동부 은행들이 쥐고 있었고 농기구 가격은 농기구 제조 독점업체들이 좌지우지했으며 운임율은 동부의 철도 트러스트들이 결정했고 경제불황은 땅값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곡물 가격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급격한 인구 상승과 농업의 기계화로 효율성이 증대되었으니 제대로만 되었으면 시간이 남아돌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농민들의 삶은 갈수록 힘들어져서 터무니없는 값에 토지를 넘기고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대농업지대(farm belt)라는 개혁과 반대되는 역풍이 불러닥치기 시작했다. 지방적 차원으로는 그레인지(Grange)라 부르는 농업협동조합이 결성되어 정부를 압박할 수준의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했다.
반면, 주간통상위원회(ICC)와 같은 단체들은 전매업자들과의 투쟁 과정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남부에서는 남북전쟁 이후 최초로 가난한 흑인과 백인 노동자 계층 농부들이 공통의 문제점을 찾고 이익을 도모하면서 흑인과 백인 농부의 연합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외에도 농부들도 도시 노동자들과도 손잡고 미국 정치를 바꿀 수도 있는 강력한 동맹체제를 새로이 구축했다.
1892년 세인트루이스에서는 그레인지 회원과 노동기사단의 잔여회원들이 함께 모임을 갖고 인민당(People’s) 즉 포퓰리스트당(Populist Party)을 창당했다. 그해 말에 열린 인민당 전국대회는 철도, 전신, 전화사업의 국유화와 보존 가능한 농작물에 대한 시장의 접근 방지책 그리고 누진 소득세를 요구하는 강령을 채택했다. 그들의 강령은 당대의 고발장이었다.
“지금 나라는 도덕적, 정치적, 물질적으로 몰락 직전에 놓여있다. 부패는 유권자, 주의회, 연방의회를 압도하며 심지어 법정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국민의 사기는 저하되었고…신문들은 매수되거나 벙어리가 되었으며 여론은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 수백만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소수를 위한 부의 구축에 쓰이고 있다…”
권력자들은 이 사태를 좌시하지 않았다. 남부 민주당 의원들은 인종적 불안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으로 인민당의 결집을 가로막으려 했다. 대부분의 도시 노동자들도 민주당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민주당과 협상을 벌이면 벌였지 인민당 쪽으로는 결코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1892년 선거에서 인민당은 3등을 차지했다. 대통령에는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당선되어 4년 전 베저민 해리슨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했다. 하지만 인만당은 제3당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1894년에는 대농업지역 주들에서 주의회 의원과 주지사 그리고 다수의 의석을 확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결과 두 대표 정당도 이제는 농부들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출처: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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